[브랜드 스토리] 프랑스(France) -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프랑스(France) -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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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파리가 전 세계 패션의 중심지로 다시 한번 우뚝 설 수 있었고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의 이름을 단번에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던 것은 1947년 첫 컬렉션에서 크리스찬 디올이 발표한 뉴룩(New Look)의 성공적인 히트와 영향력 덕분이었다.
여성들은 디올의 뉴룩을 입기 위해 다시 한번 자신의 허리를 페티코트를 이용하여 극도로 조여야만 했고,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의상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뉴룩은 극도로 단순해 보이지만 대단한 정성이 깃든 작품이었다. 어깨는 좁고 부드럽게 경사진 형태였으며 코르셋을 착용하여 허리를 가늘게 조인 허리선과 허리 아래 재킷은 부드럽게 곡선으로 들뜬 모양으로 놓여지도록 패드가 덧대어져 있었다.
아래에 착용한 스커트의 길이는 무릎 아래의 긴 길이였고 풍성한 느낌을 주기 위해 여러 층의 실크와 튤 페티코트에 의해 떠 받쳐져 있었고 스커트의 풍성한 주름을 위해서 막대한 양의 옷감이 소요되었다. 많은 여성들이 전시 동안 적합했던 단순하고 실용적인 스타일의 의상을 벗어 던지고 크리스찬 디올의 뉴룩에 열광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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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에 태어난 크리스찬 디올은 정치학을 공부했으나 파리에 작은 화랑을 열 정도로 미술에 관심을 가졌다. 화랑 운영에 자금이 부족하게 되자 친구들로부터 배운 스케치 실력을 십분 발휘하여 1930년대부터 프리랜서로 패션 스케치를 그리며 생계를 유지하기 시작했다. 삐에르 발망 디자인실에서 일하고 있던 1946년 디올은 텍스타일 제조업자인 당시의 재력가 마르셀 부삭(Marcel Boussac)의 재정적인 후원 하에 자신의 의상실을 열게 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
1947년 그의 첫 컬렉션에서 선보인 스타일이 당시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에 의해 '뉴룩'이라고 불리게 되면서 단번에 전 세계 패션계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게 되었다. 그 후 그는 지그재그, 버티컬, 튤립, H라인, A라인, Y라인이라는 실루엣의 이름이 붙여진 의상들을 속속 발표하였으며 신문은 그의 실루엣의 의상들로 장식되었다. 부풀려지거나 조여지고 리본이나 벨트 등으로 강조되는 등 디올 의상은 "빌딩처럼 잘 구성되어져 있다."는 평판처럼 복잡하고 정교하게 제작되고 뉴룩 스타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형태를 만드는 속옷에 의해 지탱되고 의존되어지는 것이 특징이다. |
뉴룩 발표 이후 1957년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기까지 10여 년 동안 크리스찬 디올은 패션계의 거장으로 군림하였다. 그의 우아하고 여성적인 의상들은 부유한 고객들에 의해 입혀지거나 널리 모방되었으며 수출과 라이선스 계약으로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또한 언론의 광고 또한 잘 활용하여 이용한 것도 그의 성공의 한 요인이 되었다.
디올의 사망 이후에도 크리스찬 디올은 일찍부터 그의 후계자로 지목되던 이브 생 로랑에 의해 성장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후 마크 보안(Marc Bohan), 지안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e) 등의 디자이너들이 전통에 충실한 디올 정신을 이어왔으며 1997년 봄·여름 시즌부터 지금까지 영국 출신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John Galiano)가 크리스찬 디올 컬렉션을 담당하고 있다. 과거의 요소에서 영감을 받아 놀랍도록 새로운 모드를 창출해 내는 천부적인 디자인 능력을 지니 존 갈리아노는 크리스찬 디올 컬렉션을 매 시즌 가장 흥미롭고 성공적인 컬렉션으로 부상시키며 크리스찬 디올 브랜드를 새롭게 변신시키고 있다. |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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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 "나는 꽃같은 여성을 디자인했다"
디오르는 첫 봄/여름 컬렉션에서 Corolle(꽃부리)과 Huit(숫자 8), 두 개의 라인에 총 90개의 디자인을 발표했다. 전쟁의 영향으로 1920~30년대 복식은 각진 어깨와 짧고 좁은 치마로 다소 남성적인 모습이었으나, 디오르는 여성의 경사진 어깨 라인을 살리고, 잘록한 허리,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길고 풍성한 스커트로 파격적인 실루엣을 제시했다. 이 디오르의 컬렉션은 전쟁으로 어려웠던 시절을 끝내며 좋았던 옛 시절, 즉 벨 에포크(영국에서는 에드워디안 시대)를 향수하는 스타일이었던 것이다. 스타일은 꽃부리를 엎어놓은 모양으로 1950년경까지 전 유럽과 미국의 하이패션 고객에게 열광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스타일은 원래의 이름보다는 뉴 룩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미국의 잡지 <하퍼스 바자>의 편집장 카멜 스노우(Carmel Snow)가 "참으로 새로운 룩이다.(It’s such a new look)"이라고 말한 데서 기인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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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 새로운 시대의 여성스타일을 만들다
뉴 룩에 대한 반응은 양분되었다. 워낙 전쟁 중 직물 소비가 제한되었던 터라 풍성한 직물을 사용한 뉴 룩은 사치스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디오르는 주간용(daytime) 한 벌을 만드는데 20마의 옷감을 사용했고, 이브닝드레스의 경우는 42마의 옷감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1947년 당시는 영국의 조지 6세가 국민들에게 의복 배급제를 시행하는 상황이었으며 젊은 엘리자베스 공주와 마가렛 공주로 하여금 뉴 룩을 입지 못하게 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디오르는 왕족만을 위한 비공개 패션쇼를 열도록 초청받았다. 미국에서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유명 인사들이 논객으로 참가한 기사가 실렸으며, 짧은 치마를 지지하는 여성들이 '무릎 바로 밑 클럽(Little-Below-the Knee club)'을 결성하여 디오르 스타일에 반발을 표현했다. |
디오르는 뉴 룩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새로운 라인들을 발표하며 50년대 파리의 최대 쿠튀르가 되었다. 디오르는여성적인 아름다움이 표현된 형태와 실용적이고 추상적인 모던 디자인 형태의 조화를 시도했다. 1954년 뉴 룩에서 하의를 줄인 형태인 H라인(상하의 모두 슬림하게 붙어 I라인이라고도 함)을 발표했고, H 라인에서 아래를 넓힌 A라인을 다음 해 발표했다. 디오르는 그해 가을/겨울 컬렉션에 A라인을 뒤집은 모양인 Y라인을, Y라인에서 허리선을 올린 모양인 Flèche(불어로 화살, 영어식으로 애로 라인(Arrow)라고도 함)을 발표했다. 맥도웰(Colin McDowell)은 이 후반기 라인들을, 디오르가 샤넬의 실용성과 발렌시아가의 부드러운 건축성에 동화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과적으로 이 라인들은 60년대 짧은 A라인 시대로 가는 길목이 되었다.
디오르의 옷은 상류 계층 소비자뿐만 아니라 대중문화에서도 강력한 러브콜을 받았다. 디오르는 1957년 3월 4일 미국 <타임>지의 표지에 실렸고, 수많은 영화배우와 유명 인사들의 옷을 제작했다. 대표적으로 히치콕 감독의 영화 [무대 공포증(Stage Fright)](1950)에서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입은 모든 의상과,마크 롭슨 감독의 영화 [오두막 집(The Little Hut)](1956)에서 애바 가드너가입은 의상 14벌을 제작했다. 그 밖에도 배우 제인 러셀, 그레이스 켈리, 리타 헤이워드, 발레리나 폰테인 등이 디오르를 입었다. |
디오르는 사업적 감각도 좋은 디자이너였다. 1947년 철저하기로 유명한 사업가 마르셀 부삭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사업을 정비할 때, 부삭이 출자했던 다른 사업체들과 비교하여 예외적으로 많은 자율권과 의사 결정권을 따냈다. 사업 감각에 비해 사교적이지는 않았던 디오르는 영업 책임자 수잔 룰링(Suzanne Luling) 등을 기용한 강력한 조직으로 현대적인 운영을 시도했다. 쿠튀르에서는영업 담당자들이 자신의 고객과 철저하게 일대일 관계를 유지했고, 미국의 기성복 매장에서는 단순하고 상업성이 높은 디자인을 판매하였다. 디오르의 컬렉션은 항상 새로운 스타일, 익숙한 스타일의 변형, 입증된 클래식의세 가지 기조로, 각각 삼 분의 일씩 매 시즌의상품 구성 기획 틀을 유지하며 새로움과 상업성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다.
디오르는 쿠튀르 하우스의 라이선스 사업을 처음 시작한 인물이기도 하다. 1950년 넥타이를 시작으로 모피, 스타킹, 모자, 핸드백, 장갑, 보석, 란제리, 스카프 등에서 라이선스 사업을 했다. 쿠튀르 하우스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당시 쿠튀르 조합에서 강력한 비난을 받았지만, 결국 다른 쿠튀르 하우스들도 높은 수익을 좇아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다. 미국의 한 스타킹 제조 업체는 당시로써는 어마어마한 금액인 $10,000을 로열티로 지불하고 디오르의 라이선스 획득을 제의했으나, 디오르는 이를 거절하고 판매액의 일정 비율을 로열티로 받는 형식의 계약을 체결해 결과적으로 훨씬 좋은 수익구조를 만들어냈다. 디오르 하우스는 디오르의 사후에도 이브 생 로랑이 발표한 트라페즈 라인(사다리꼴 라인) 등의디자인으로파리 쿠튀르의 주역이 되었고, 이브 생 로랑을 비롯하여 마르크 보앙, 지안 프랑코 페레(Gianfranco Ferré), 존 갈리아노 등 스타 디자이너들을 양산하며 그 생명을 이어갔다. |